“뜨거워진 마음으로 이성봉 목사님을 회고합니다.”

 

이성봉 목사 연보

1990.  7.    평남 강동군 이인실씨의 장남으로 출생

1918.  2.    평남 중화읍 이영기 장로의 장녀와 결혼

1928.  3.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졸업

1928. ~ 1930. 수원교회 신개척(성전 건축), 목포교회 시무(성전 건축)

1932.        목사안수

1936.        신의주교회 시무(성전 건축)

1938.        전국 부흥사 임명받음(총회에서)

1939.        일본 유학과 순회 전도, 만주 전도

1945.  8.    해방과 더불어 이북에서 성결교회 재건 운동

1946.        월남하여 남한 성결교회 재건 순회집회(임마누엘 특공대)

1955.        신촌교회 신개척(이성봉 목사 자택에서)  

1959.        미국 순회 전도(8개월), 1일 1교회 순회집회 시작(480교회)

1965.  7.    성결교 합동 총회에서 마지막 설교

1965.  8.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한국교회가 이 땅에 여명을 밝힌 지도 어언 100년이 지났습니다.

  소외되고 짓밟힌 우리 민족이 저린 가슴과 가난한 눈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던 시대에 한 줄기 빛으로 사람들에게 소망을 심어 주었던 한국교회.

  우리 기독교가 지금처럼 든든하게 자리매김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분들의 헌신과 기도, 그리고 뜨거운 눈물이 필요했습니다.

  많은 날들이 지난 오늘에서야 이렇게 이성봉 목사님의 지난 발자국들을 돌아보는 것은 그 분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담대하게 주님을 따르던 삶이 우리의 기억 속에 너무나 소중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생전의 이성봉 목사님을 ‘한국의 무디, 전설적인 부흥사’였다고 표현하곤 합니다. 교단이 해산되어서 누구하나 오라는 사람도 없고 보내는 사람도 없었던 해방 직후. 그야말로 삭막한 황무지 같았던 교계를 살려 보고자 자진해서 사방에 흩어진 옛날의 성결교인들을 찾아 모으고, 밤낮으로 뜨겁게 집회를 하고, 그리하여 이곳 저곳에 작은 교회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정의 핍박으로 오랫동안 굶주리고 목말랐던 심령들은 봄비를 맞은 초목같이 은혜의 소나기를 맞았고, 1일 1교회 순회부흥회를 작정한 그가 소달구지에 몸을 싣고 가는 곳마다 성령의 불길이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바라보며 애통하며 탄식했던 눈물의 기도가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성결교회를 재인식시키겠다는 의지와 시골이나 산골짜기의 작은 제단들까지도 은혜를 골고루 나눠주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작은 일에도 충성하겠다는 열정만이 가득했더랬습니다.

 

  그만하면 업적을 자랑할 만도, 지위를 내세울 만도 하건만 평생을 어려운 사람들의 입장에서, 지극히 낮은 곳에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그는 가족을 위해 어렵게 어렵게 마련한 작은 집 한 채도 성전을 짓다가 어려움에 부딪친 한 전도사에게 선뜻 팔아서 넘겨 주고 가족들은 다시 셋방으로 이사해 버릴 정도로 마음이 깨끗하셨고, 돌아가시기 일 주일전 성결교 합동총회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라”는 마지막 설교를 불편한 몸으로 앉아서 하시고는 1965년 8월 2일 돌아가셨을 그 당시에도 가족들에게 남긴 유산이라고는 연희동 아홉 평짜리 흙담벽으로 지은 서민 주택 한 채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어떤 환란이 와도, 핍박이 와도, 죽음이 몰아쳐도 정금과 같이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을 지키며 오직 주님만 존귀케했던 삶을 살으신 이성봉 목사님. 오늘 이렇게 우리 성결인들 모두가 모여서 그의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모습을 가슴 뜨겁게 회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