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목사의 발자취...

  출생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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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사는 1896년 10월 20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했다. 당시에 모두가 그랬듯이 엄격한 유교적 전통을 지키는   가문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두뇌가 명석한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에 능통하여 20세의 나이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유교의 전통에 젖어든 부모의 슬하에 살면서 17,8세에 복음을 받아들여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그의 대쪽같은 곧은 성격은 그로 하여금 경건한 신앙의 틀을 형성하게 하였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였다. 청년 이건은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을 추구했던 이씨 조선이 일제의 침략으로 어이없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이 겨레의 구원을 위해 기독교에 큰 기대를 갖게 된것이다.

 

 

  목회과정

  1920년 청운의 꿈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시 대학(明治學院) 신학부에 입학하여 2년간 신학문에 정진하다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곧 조국을 위해 일하는 것임을 깨닫고 귀국하여 1922년에 경성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2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제14회) 하게 되었다.

  그해 6월 당시 영적 각성과 전도로 유명한 도시 평양으로 파송받아 부교역자 김제근과 함께 전도사로서 평양교회(일명; 상수리교회)를 개척하였다.

  위장병으로 오래 고생하면서도 3년간 그의 헌신적인 목회는 당시 성결교회가 잘 알려지지 않은 평안도 지역에서 성결교회를 알리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1928년 교회를 새로 건축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목회에 전념하던 중 1931년 모교인 경성성서학원의 교수로 초빙받았다.

  후진 양성을 위해 교수로 사역중에 일제말기 왜정의 신사참배와 황제숭배의 강요에 끝까지 반대하여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후학에게도 이 신앙을 전수하였다. 본 교단의 재림 교리가 문제되어 1943년 12월 29일에 교단이 강제로 폐쇄될 때 그 아픔을 감당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경성신학교 교장이 되어 신학교 재건의 막중한 책임을 맡아 4,5년간 학교를 크게 발전시켜 장로교, 감리교 신학교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위치에 올려 놓았다.

  이렇게 학교가 재건의 틀을 다져가던 중 6·25사변이 일어났다. 이목사는 피난하지 않고 박현명, 김유연목사 등과 함께 신학교를 사수하다가 1950년 8월 어느 날 이른 아침 북괴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붙들려 납북되었다.

 

  납북과 순교

  한국 성결교회의 초대 목회자로 큰 족적을 남긴 이건목사의 납북은 교단적으로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후에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내외문제 연구소에서 제공한 “죽음의 세월”에 실린 글에 의하면, 이건목사는 발진티푸스에 시달리며 평양방면까지 끌려가 고초를 겪으면서도 남하하지 못한 김인준목사, 박상철목사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수용소 안에서 신앙운동을 일으키다가 발각이 되어 끝내는 1951년 김유연목사와 함께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우리 교단의 자랑할만한 이건목사는 민족 수난의 역사 앞에서도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신앙을 지킨 성결인의 거목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혹독한 북한 수용소의 생활 속에서도 뜨거운 복음의 노래를 부른 개척교회 목회자, 활천 주간, 경성신학교 교장 그리고 성서학자요 시인으로 불리워지며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말을 모아볼 때, 우리 모든 신자들과 후배 목회자들이 본받을만한 영원한 성결인이다.